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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 비 온 뒤 어느 날

category 책 속에서 2020. 8. 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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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 비 온 뒤 어느 날

 

 

 

비 온 뒤 어느 날
은행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입니다.

 

비에 쓰러졌던 꽃나무들이
열심히 일어서며
살아갈 궁리를 합니다.

 

흙의 향기 피어오르는
따뜻한 밭에서는
감자가 익어가는 소리.

 

엄마는 부엌에서
간장을 달이시고
나는 쓰린 눈을 비비며
파를 다듬습니다.

 

비 온 뒤의 햇살이 찾아 준
밝은 웃음을 나누고 싶어
아아 아아
감탄사만 되풀이해도
행복합니다.

 

마음이여 일어서라
꽃처럼 일어서라
기도처럼 외워보는
비 온 뒤의 고마운 날.

 

나의 삶도 이젠
피아노소리 가득한
음악으로 일어서네요.

 

 

<시집-기쁨이 열리는 창> 

 

 

 

 

이해인 수녀

 

천둥 번개까지 치며 밤새 폭우가 쏟아지면 조금 겁도 나고 무서운데

아침에 다시 햇빛을 보고 맑은 하늘을 보면 얼마나 신기한지 몇 번이고 하늘을 올려다보곤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움이 많은 내 주변의 친지들 모습을 떠올리다 보니 꽃이나 나무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갈 궁리’를 한다는 시의 표현이 저에게 새롭게 와닿습니다.

 

 

‘수녀님, 내 몸이 너무 많이 아프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을 일도 없고 재미없는 이 세상 빨리 떠나고 싶다니까요’

 

 

이렇게 푸념하는 이들에게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니 일단은 감사해야죠’

 

‘낫기 위해 아픈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세요’라고 말을 하지만 저 역시 많이 아플 적엔 이런 말이 스스로 힘이 없게 여겨집니다.

 

 

얼마 전 갑자기 왼발에 급성으로 통풍이 와서 얼마나 아프던지 걷는 것도 불편하고 아무 일도 집중을 할 수 없는 안타까비에관련된시,움에 울 뻔했는데, 육신의 고통을 마주한 인간의 무력함을 다시 한번 깨우친 시간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플 적엔 어떤 악기보다도 피아노로 연주된 음악들이 위로가 되어 지금도 자주 듣는 편입니다.

오늘은 레온 플라이셔가 연주하는 바흐, 쇼팽, 슈베르트의 곡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봅니다.

 

 

거짓말처럼 통증이 멎고 나니 비 온 뒤의 맑고 밝은 햇빛이 마음에도 스며들어 누굴 좀 도와줄 일이 없나? 사소하지만 뜻깊은 애덕의 행동을 하고 싶은 열망이 저를 재촉하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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